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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제언] 40년째 지켜지지 않는 '이상한 법' 김상진 연구원 부이사장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6.03 09:16 조회수 967

“일부 현장에서 ‘효율성’이란 허울 아래 분리발주 원칙 지켜지지 않아
안전한 전기공사는 ‘분리 발주’에서 시작
「전기공사업법」만 잘 지켜도 우리가 희망하는 안전사회로”

김상진 ㈜준마 대표/공학박사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20년 전 의약 분업 때 등장한 구호다. 의약 분업은 의료, 조제를 구분해 의·약사가 서로 업무를 점검하며 약물 오남용을 막는 게 취지다. 도입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의료계는 파업도 불사하며 장외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결국 수용하고 시스템 정착에 힘을 보탰다. 이제 의사에게 진료를, 약사에게 조제를 받는 건 상식이 됐다. 마침내 국민들이

숙원했던 약물 오남용방지 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도입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법이 여기 있다. 1976년 제정된 「전기공사업법」 11조 ‘분리 발주 제도’다. “전기 공사는 전기공사기업에게”라는 간단한 내용이다. 이 조항에 따라 작업 특성상 설계·시공을 분리하기 어렵거나,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안 외에 모든 전기 공사 및 기술 제안 입찰은 반드시 분리 발주해야 한다.

 

 

가장 최근 사례가 내년 5월 열리는 강원세계산림엑스포다. 산림엑스포 조직위원회는 지난 3월 40억 9,090만원 상당의 ‘모험 전망대 제작·설치’ 사업을 발주하면서 전기공사업을 발주 대상에서 제외했다.

조직위가 한국전기공사협회로 보낸 공문에 따르면 근거는 이렇다. “모험 전망대는 작가의 독창적 방식으로 기획된 작품으로, 전기 공사를 분리할 수 없어 이를 제외하고 계약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조직위의 문제는 법을 정면 위반하면서도 큰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공공 부문도 이럴진대 민간 부문은 어떨까. 특히 산림엑스포 사례는 ‘보복’ 논란까지 불거졌다. 강원도회는 지난해 9월 강원도 감사위원회에 모험 전망대 설치의 전기공사업법 위반 등에 대한 감사를 요청했다.

이때 미운털이 박히면서 발주 배제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왜 분리 발주를 해야 할까. ‘품질과 안전’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음식의 경우에는 피자집도 냉면을 만들어 팔 수 있다.

다만 전문성이 떨어져 맛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음식이야 한 번 먹고 말면 된다. 그러나, 안전을 담보 하는 전기 공사는 그렇지 않다. 작은 실수가 인명 사고로 이어져 큰 피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럼 왜 분리 발주를 안 할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설계·시공을 나눠서 하는 게 번거로워서다. 이른바 ‘통합발주’ 방식이 인기를 끄는 까닭이다.

‘통합발주’는 설계·시공을 일괄 입찰하는 것이다.

이는 계약사 입찰 기간을 단축하고, 설계·시공사 간 경쟁을 통해 품질 향상을 유도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발주 기관의 기본 설계를 따라가 민간 기술력을 충분히 활용하기 어렵고, 중소 건설사의 수주 기회 감소 및 부실시공이라는 단점도 존재한다.

분리 발주는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가 아니다. 독일은 건설공사도급계약규칙(VOB)에 따라 입찰 및 계약 제도를 운영한다. 일반 발주 공사에 해당하는 VOB-A의 경우 시공 및 자재 공급이 함께 발주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뉴욕·펜실베이니아주 등은 아예 분리 발주를 명문화했다.

일본은 분리 발주 선진국이다. 건설업법 제4항을 통해 “전기·통신·환기·급배수·냉난방·승강기 등 건설 설비 공사는 전문 공사업자에게 분리 발주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주요 공공기관의 공사 90% 이상은 분리 발주로 진행되고 있다. 또 중소 규모 공사 업체를 위한 보호 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분리 발주를 꺼리는 두 번째 원인은 사고 시 책임 소재다. 물론 최선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통합 발주 방식은 수주회사 한 곳에 전부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다. 이는 발주기관만의 편의적인 발상이다. 그러나, 수주회사는 하도급업체가 잘못한 문제까지 억울하게 책임을 질 수 있다. 분리발주의 경우, 오히려 발주자가 감독만 잘 하면 오히려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릴 수 있다. 단지 발주자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불법까지 합리화할 순 없다.

발주자의 번거로움이 국민의 안전보다 중요할까?

전기공사업계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실제 법 위반으로 처벌된 사례도 있다. 2019년 1월 벌금형을 받은 서울투자운용이다.

당시 서울투자운용은 강일2지구 공공주택 건설 공사를 통합 발주해 「전기공사업법」 위반 혐의로 한국전기공사협회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재판부는 “분리 발주가 불가능한 공사도 아니었고, 위반에 대한 고의성이 인정된다”며 협회 손을 들어줬다.

법원도 분리 발주의 정당성을 인정한 셈이다. 서울투자운용은 항소심을 신청하고 항소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얼마 뒤 이를 취하하면서 벌금형이 최종 확정됐다. 서울투자운용 사례는 전기 공사 분리 발주 위반으로 처벌된 첫 번째 사례로 알려진다.

그동안 우리는 ‘안전한 사회’를 지향해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모든 국민은 ‘안전’을 보장 받을 권리가 있다. 더는 편의와 관행이라는 변명으로 안전이 뒤로 밀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안전한 전기 공사는 ‘분리 발주’에서 시작한다.

「전기공사업법」 만 잘 지켜도 감전 사고와 화재를 예방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로써 우리가 희망하는 안전 사회의 8부 능선은 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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